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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달 설교 모음

2/1/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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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4-7      분노를 다스리라       2026-2-1
 
서론

개신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879년 영국 선교사 John Ross 와 John Macintyre에 의해서 입니다. 이러 1884년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인 Horace Allen가 온 후 1885년 Horace Underwood와 감리교 선교사인 Henry Apenzeller가 들어와 선교를 시작합니다.
보통 다른 교단들이 한 나라를 선교를 하게 되면 선교 구역을 놓고 서로 다투고 경쟁하는 구조가 많은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경기도와 황해도는 함께 선교하였고 경상도와 강원도는 장로교가 충청도와 전라도는 감리교가 선교를 맡았습니다. 늦게 들어온 침례교는 결국 그들이 맡지 않은 함경도와 북간도 울릉도 등 산간지역으로 들어가 선교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단간의 마찰이 없었다는 것이 큰 특색입니다.
반면에 영국국교, Anglican church는 다른 교단을 동역자로 보지 아니하고 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 국교는 다른 교단에 대해 옥에 가두고 인권을 유린하고 심히 탄압을 하였습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다른 교단의 사람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그들이 바로 청교도들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함께 오늘 성경에 나오는 가인에 대해 살펴 봄으로써 우리 속에 있는 가인을 발견하고 우리 사이에 있는 분노를 다 제거해 버리심으로 가인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론
I. 먼저, 가인은 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가 아벨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절)
가인은 그의 제물이 열납되지 않자 아무 잘못도 없는 자기 동생을 blame 합니다. 만일 가인이 자기 혼자만 있었다면 비교되지도 않고 하나님이 그의 재물을 열납 하셨을텐데 자기 동생이 더 좋은 예물을 드렸기 때문에 자기는 무시되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동생을 경쟁 대상자로 보고 그를 없애 버려야만 자신이 받아들여질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생을 들로 불러내고는 몰래 그를 죽이고 맙니다.
우리는 때로 나의 경쟁자가 있어서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사람만 없어지면 내가 사랑 받는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로 경쟁자들이 아니라 동역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을 잘못 알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하나님 안에 우리는 다 동역자들입니다. 경쟁을 하면 서로 물고 죽이게 되지만, 동역을 하면 서로를 세워주게 됩니다.
 
II. 둘째, 가인은 동생을 향한 분노를 다스리지 못함으로 돌이킬 수 없는 화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5-7절)
5,6절을 보십시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자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시자 가인의 안색은 울그락 불그락하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달아올랐습니다. 가인은 ‘내 제물은 왜 받아들이지 않았나’하고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기는 보다는 ‘하나님이 내 제물을 받지 아니하시다니’ 하는 섭섭한 생각과 미움에 빠져버립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가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고 어려워지면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잘 승화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죄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가인의 하나님에 대한 증오심은 다스리지 아니하고 파괴의 본능에 내어맡김으로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 없고 내 손에 걸리면 다 물골을 내놓겠다’ 하는 악독이 그를 삼켰습니다. 한 바탕 사고를 칠 것 같은 가인을 향해 하나님은 경고를 해 주셨습니다. 7절을 봉독하시겠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낮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미운 마음과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파괴의 본능이 꿈틀거립니다. 그때 우리는 악에게 넘겨주면 안 됩니다. 악을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는 증오를 승화시키는데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나의 잘못을 생각하려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 내게 섭섭하게 한 것만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네 자신이 선을 행치 않은 것을 상기해 보라’고 합니다. “죄가 문에 엎드린다”는 말은 마치 치타가 나무 위에서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두 마리의 염소를 낚아채기 위해 노려보고 있는 것처럼 악한 마귀는 우리를 삼키기 위해 우리가 싸우고 있는 동안에 우리를 주시하면서 웅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살기를 느끼지 못하면 우리끼리 싸우다가 마귀의 밥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일이 벌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일이 벌어지고 난 후를 생각해야 합니다. 죽여버리는 것에서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이고 나서 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죄를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로 죽여버리라고 충동하지만 우리는 일이 벌어지기 전에 분노와 증오를 승화시키라고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분노를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는 크나큰 후회를 하게 됩니다. 잠언16:32을 보십시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참는 자가 이깁니다. 화를 발칵내며 분노를 터뜨려 버리면 당장은 속 시원한지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 그 사람의 평생 올무가 되어 그것에 매이게 됩니다.
분노는 자기의 잘못이 드러날 때 나옵니다. 9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고 발끈 성을 냅니다. 분노는 나의 죄가 발각되는 데에서 나옵니다. 똥낀 놈이 성내는 법입니다. 자기가 찔리는 것이 있으니까 분노합니다. “그래, 내 잘못이지” “내가 못난 탓이지”하는 사람은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회개를 합니다. 분노하는 그 자체가 벌써 나의 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노에 어르렁 거리며 사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분노를 떨쳐 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은 분명히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얼마나 마음 상하는 일이 많습니까? 때로는 정말 얼토당토하지 않은 것으로 우리를 분노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먼저 “나에게 무슨 잘못이 있나?” 하고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만 사탄의 밥이 되지 않습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나 죽고, 너 죽자”하는 사람은 웅크리고 있는 사탄의 밥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가인처럼 죄가 발각되기 전까지는 이를 숨기려하고 모른 체 시치미를 떼려고 합니다. 자기가 아벨을 죽여 놓고서도 적반하장(賊反荷杖) 격으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고 도리어 발끈 성을 냅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죄를 숨기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가시에 찔렸으면 어두운데서 핀셋으로 드듬으려고 하지 말고 환한 빛 가운데 나와야 뽑아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고 대드는 것이 통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각 날 때까지는 철저히 숨기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인은 그 화를 참지 못하고 아벨을 죽이고 맙니다. 세상살이가 항상 남과 비교하면서 살아갑니다. 때로는 사람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때려죽이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크게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III. 셋째, 예수님의 보혈로 죄를 극복해야 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리라." 죄를 극복하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죄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의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는 말은 가인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표를 주셔서 가인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실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17절을 봉독하시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죄를 회개하며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하나하고 말씀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춘천은 닭갈비집으로 유명합니다. 닭갈비는 원래 1950년대에 춘천시 중앙로에서 닭 불고기 집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춘천에서 닭갈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0년대 강원도 춘천시 중앙로 2가 18번지, 현재 동양증권 옆 주차장 자리에서 김영석 씨가 닭고기에 고추장 양념을 해서 연탄불에 석쇠 구이로 팔기 시작한 것이 최초이다. 원래 그는 돼지갈비 장사를 하다가 돼지 파동으로 인해 품귀현상이 발생하자 돼지고기 대신에 닭고기를 양념하여 팔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자 많은 사람들이 같은 곳에 같은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김영석씨는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요리하는 법을 잘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점점 ‘철판’ 닭갈비로 바뀌면서 늦게 시작한 그들이 오히려 “원조”라는 말을 간판에 써 붙었습니다. 이 또한 그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같은 곳에 같은 요리점이 생기는 것은 손님을 뺏기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한 곳에 같은 식당이 모임으로 명소가 되어서 더 많은 손님들이 전국에서 찾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김영석씨는 그의 식당 곁에서 같은 식당을 연 그들을 적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동업자로 여겼기 때문에 그런 좋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도 만일 가인이 동생을 경쟁자가 아닌 동역자로 여겼더라면 이렇게 말해야 했을 것입니다. “야, 너는 어떻게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이 그렇게 열납하시게 되었니? 나도 좀 가르쳐 줘라.” 그렇게 했더라면 화평 가운데 형제간의 관계도 좋아지고 하나님도 그의 제사를 기뻐게 받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서로를 경쟁의 대상자로 생각해서 “저 사람이 없으면 내가 큰 일을 맡을 수 있을텐데” 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역자로서 서로 세워주는 귀한 온누리 교우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롬10:9-13      믿음으로 얻는 구원      2026-2-8
 
서론
어느 교회의 장로님이 taxi를 타고 공항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택시 운전사가 갑자기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혹시 예수님 믿으세요?” 장로인 그는 이렇게 열심히 전도하는 운전수가 감사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교회를 다닌 모태 신앙인입니다.” 그러자 택시 운전사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모태 신앙인이냐 아니냐를 물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시는지 물었습니다.” 자기를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화가 난 학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는 어떤 교회의 장로입니다” 이 말에는 운전수는 기죽지 않고 다시 물었습니다. “저는 선생님이 장로이냐 아니냐를 물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시는지 물었습니다.”
이 말은 들은 장로는 정말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신이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고백이나 체험 없이 막연하게 교회를 다니고,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운전사는 조용히 구원의 도를 일러주었습니다. 그 후 장로님은 놀라운 변화의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 인간의 삶의 문제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나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 나는 오늘 죽어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한 번만이 아니라 생에 계속적으로 물어보아도 괜찮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이 질문을 다시 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가실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이 자신 있게 대답하실 수 없으시다면 지금 제 말을 잘 들으실 필요가 있으십니다.


본론
I. 먼저,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1-8절)
인간은 아무리 깨끗하게 산다고 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 있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고 한 달에 사흘씩 금식하고 열심으로 율법을 배우고 열심히 봉사했으며 성도들을 핍박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일인 줄 알고 곳곳마다 찾아다니며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여전히 똑같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도달하는 것 같으면 또 미끄러지고 다시 열심 내어 도달하려고 하면 또 미끄러지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도 여전히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공허감을 느꼈습니다. 가까이 가기에는 하나님이 너무나 멀리 계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자기의 의만 나타나고 교만해지고 상대적으로 남을 무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풀을 먹는 메뚜기가 되기를 원했지만 결국 자기라는 존재는 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거미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천근 만근 짐을 지고 살아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고 그가 믿음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 받고 보니 마음이 그렇게 쉽고 가벼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유대인들이 구원과 상관이 없이 헛되이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10:1-3절을 보면 유대인들처럼 그리스도의 의에 합당치 않은 열심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열심입니다. 방향을 잘못잡고 역풍을 향해 열심히 노를 저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열심히 하고도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목적지와 더 멀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방향을 알게 되면 내가 아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바람이 나를 실어다가 목적지를 향해 내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 바울은 그들이 “바른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다”고 합니다. 구원은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에는 누구나가 무엇인가 내가 선행을 해야 구원을 얻을 것 같습니다. 그런 죄에 대한 보상심리는 누구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해서 내가 나의 죄를 갚아보려는 생각은 어리석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으로 죄를 보상해 보려고 하지만 미달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근거하지 않은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아무것이나 붙잡는다고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구명대를 내려 주셔야 우리가 삽니다. 우리의 의로움의 근거는 우리의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구명대 즉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4-8절)
의에는 두 가지 의가 있습니다. 먼저, 모세가 보여준 의로 우리가 행함으로 얻는 의입니다. 즉 율법을 온전히 준행함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의를 얻기 위해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게 십계명과 그 외에 수많은 율법의 사항들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비해 예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의가 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얻는 의입니다. 우리 함께 6-8절을 함께 봅시다.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가 아주 쉽고 가까이 있다는 말입니다.
왜 손 쉬운 window를 두고 복잡하고 어려운 Dos를 쓰겠습니까? 왜 손쉽고 간단한 CD player를 두고 cassette tape을 들으려고 하겠습니까? 이 두 번째 의는 내가 하나하나 다 program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programmer 되신 예수님께서 다 program 해 놓으신 것을 우리는 그냥 갖다 쓰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우리는 항상 의로움의 근거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고 우리는 무엇인가 봉사를 하고 일을 하게 되면 나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채 헛된 봉사를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주 자신을 돌이켜 보지 않으면 실컷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내 영광만 취할 수가 많이 있습니다. 돌다리도 두르리며 건넌다고 우리도 나날이 자신을 비추어 봄으로서 내가 그렇지는 않은가 살펴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I. 둘째, 9,10절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이 쉽게 의롭게 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우리 기독교 교리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같이 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10절을 봉독합시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어떻게 의롭게 된다고요? 그렇습니다.
1. 먼저,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롭게 됩니다. 무엇을 믿어 구원을 얻게 됩니까? 9절에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내 힘으로 의로워질 수 없기 때문에 의로우신 예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수영을 못하는데 물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물에 빠져서 수영을 배울까요? 늦었습니다. 그때 lifeguard가 buoy를 던져주면 그것을 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마음에 믿는다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buoy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내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lifeguard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혼자 지기에 짐이 너무 무거울 때 내 무게를 그에게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우리가 먼저 마음으로 믿고 그 다음으로 신앙을 입으로 고백함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고백하라고요?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라고 말로 고백하라고 합니다. 함께 고백하시겠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곳에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그런데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말과 “나의 주”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시라”는 말은 “메시야,” 즉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구속하실 분”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나의 주”라는 말은 “그분이 나의 주인으로 나는 예수님께 속해 있다”는 말입니다. 2,000년 전에 ‘kyrie’, 즉 ‘주님’이라는 말은 사실 당시 황제였던 Caesar를 지칭하는 말로 ‘Caesar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kyrie 라고 고백했기 때문에 시이저가 그렇게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고요? 먼저,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우리 입으로 예수를 구세주라고, 즉 나의 주인이요 구원자라고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9절에서 13절은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믿습니까?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여러분의 의는 구원을 얻기에 부족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헤어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여러분의 죄를 해결하지 못하고 발버둥치고 계신다면 lifeguard 되시는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께 이 시간 도움을 청하십시오.
(구원 초청)
함께 기도 드리겠습니다.(Let us pray together.) 여러분 가운데 이 시간 예수님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그 이름을 시인하시어 구원을 얻기 원하시는 분은 없으십니까? 있으시면 잠시 손을 들어 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13절) 주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예수, 예수” 그렇게 부른다고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부른다는 말은 예수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savior로서, Lord로 믿고, 그를 마음속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모셔 들이는 것은 참으로 쉽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내 마음에 들어오십시요” 하고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오신다고 하셨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주님(Dear Lord Jesus) 저는 죄인입니다. (I know that I am a sinner) 주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 (and I need your forgiveness.) 주님께서 저의 죄를 위해 죽으심을 믿습니다.(I believe that you died for my sins.) 저는 제가 지은 죄를 뉘우칩니다. (I want to turn from my sins.) 주님을 제 마음과 삶에 모셔들입니다. (I now invite You to come into my heart and life.) 이제부터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구주로 믿고 따르겠습니다. (I want to trust and follow you as Lord and Savior.)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In Jesus' name. Amen.)

눅7:36-50      거룩한 낭비       2026-2-15
 
서론
그런데 올해부터 우리 교회에 꽃을 놓기로 했습니다. 꽃이 이렇게 있으니까 어떻습니까? 관심이 없는 분도 많으시겠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 있으니까 좋기는 하지요?
저는 실용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낭비하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온 후로 25년 동안 교회 강단에 꽃꽂이를 하지 않았습니다. 꽃꽂이를 저는 한 번 잠시 보고 버리는 낭비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발렌타인 데이 때도 집사람에게 꽃을 준 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선물을 하나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7월 4일 독립 기념일이 되면 불꽃놀이를 하고 싶어 했지만 저는 낭비라고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대신에 아이들하고 맛있는 것 하나 더 사 먹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이 옳지만은 않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때로는 낭비가 실용보다 더 가치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불꽃놀이를 했더라면 화약 값보다 더 귀한 아빠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러한 어리석은 낭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여인의 거룩한 낭비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본론
I. 죄 많은 여인의 낭비
한 바리새인의 집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셨을 때 한 죄 많은 여인이 울며 예수님의 발에 귀한 향유를 붓과 그녀의 머리칼로 닦아주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야말로 경악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이라고 할 때 창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키스를 하면서 향유를 붓고 머리를 닦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길이 어떠했겠습니까? 조소와 역겨움으로 참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 여인이 연회를 다 망쳤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이상하게 보기 시작합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님이 이 여자가 창기라는 것을 안다면 어떻게 저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미친 여자야, 내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당장 꺼지지 못해.” 이랬어야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죄 많은 여인이 하는 대로 다 받아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선지자이기는 한 건가?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습니다. 그녀의 많은 죄를 용서하신 주님이 너무나 감사하여 눈물로 그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이는 그녀가 주님을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길지만 40절에서 47절까지 한 절씩 봉독하시겠습니다.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도 얼마나 난처한 상황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죄 많은 여인의 편에 서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그 여인이 죄인이라는 사실 하나로 그녀가 하는 모든 일에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백 명의 의인의 편을 들지 않으시고 한 명의 죄인의 편에 서셨습니다.
그 여인의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귀한 순전한 나드 향유라고 합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장정이 1년 번 돈입니다. 6만불 정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마 이 여인은 몸을 팔아 이 돈을 모았을 것입니다. 시집갈 밑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여인은 여러 번 이 향유를 팔아야할 일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아껴온 것입니다. 이 여인의 전 재산입니다. 이 귀한 것을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왜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차 이렇게 말합니다. 함께 마태복음 26:8,9절입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그렇지 않습니까? 6만불의 향유를 쏟아부어 한 번 향기만 날리고 없애는 것이 얼마나 큰 낭비입니까? 이 여인이 결코 잘 행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은 미친 짓을 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은 여인은 그 감사한 마음을 그녀가 가장 아끼는 것을 예수님께 드려야겠다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이것은 엄청난 낭비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아는 주님이 보실 때 이것은 엄청난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낭비조차 아름다운 것입니다. 여인은 그의 모든 것을 예수님을 위해 쏟아 부었습니다. 왜냐하면 귀한 향유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님의 낭비
하나님도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큰 낭비를 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죄 많은 인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향유를 인간들을 위해 깨뜨려 부으셨습니다. 단지 죄인된 우리를 많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함께 요한복음 3:16절을 봉독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도 반항하고 악한 짓만 하는 죄인인 인간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런 죄인을 구하시기 위해 그의 독생자 귀한 아들을 대신 속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쓸모없는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그의 귀한 아들을 낭비하신 것입니다. 왜요?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셨나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그의 독생자를 희생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한하영씨, 한 하영씨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하영씨가 대신 죽어줄만큼 사랑하는 대상이 있습니까? 한하영씨가 나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겠습니까? 남편을 위해 대신 죽을 수 있겠습니까? 이안이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겠습니까? 이안이는 그렇게 귀한 아이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귀한 아들 예수를 우리를 대신해서 바쳤습니다. 그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짜리입니다.
죄 많은 인간을 그대로 버려두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서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masterpiece가 그렇게 끝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애착이 크셨습니다. 하나님은 중대한 결단을 하셨습니다. 그의 아들을 대신 죽게 함으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다시 요한복음 3:16절을 봉독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말은 그의 독생자를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기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한하영씨, 이안이가 놀다가 이마를 찧어서 피가 났다면 마음이 많이 아프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십자가에 대못으로 박혀 찢기고, 허리에 창이 찔려 창자가 새어나오고, 머리에는 가시관으로 피가 흘러내리는 그 모습을 보시며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저를 버리시는건가요?” 하고 절규할 때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셨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의 절규에 귀를 막고, 흐르는 피에도 눈을 감고 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 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조건은 단 하나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자는 자신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빠지지 않고 예수의 공로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가 구원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쓸모없는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의 귀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놓아 피 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무모한 사랑이 그 큰 낭비를 하게 하였습니다. 그 귀한 향유 옥합을 우리를 위해 깨뜨리셨습니다.
 
III. 우리의 낭비
이러한 사랑은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 낭비를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죄를 용서받은 우리도 그 여인처럼 우리의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귀한 시간과 우리의 귀한 재능과 우리의 귀한 물질을 주님을 위해 바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하나님 아버지, 우리같이 못나고, 반항하고, 배은망덕한 죄인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귀하신 외아들을 대신 죽게 하시어 구원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생명 주신 주님을 우리도 남은 날 동안 목숨 바쳐 사랑하며 섬기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대하20:5-13      여호와를 신뢰하라       2026-2-22
 
서론
사람이 살아가면서 많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을 취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적인 방법을 취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은 그 결과가 눈에 바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쉽게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눈에 나타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든든히 가진 자만이 하나님의 방법을 택할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의지한 자는 결국에 우리가 의지한 자에 의해 망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너무나 많이 보아왔습니다. 예를 들어 북왕국 이스라엘이 아람을 의지하여 유다를 제어해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람의 도움으로 유다를 황폐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BC 722년 그를 도와준 아람에게 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한 자는 내가 피흘려 싸우지 아니하고도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호사밧의 믿음의 결단을 통하여 생의 위기를 맞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할 지를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I. 먼저, 여호사밧의 기도가 응답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3, 4, 12절)
여호사밧은 아람이 모압과 암몬과 합동작전으로 그들을 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였습니다. 남쪽에서 모압과 암몬이 사해를 건너 이미 엔게디까지 들어왔고 북쪽에서는 아람이 쳐내려옵니다. 그러니 그의 간이 녹았습니다. 그는 도움을 구하려 애굽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갑니다.
3, 4절을 보십시다.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간 큰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물에 빠지면 눈에 보이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 nature 입니다. 여호사밧은 세상을 대해 눈을 꼭 감고 여호와 하나님 얼굴만 보겠다고 합니다.
12절에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세상에도 한 다리 걸치고 하나님께도 한 다리를 걸치는 자는 하나님께서 몰라라 하실지 모르지만, 오직 주만 바라보는 자를 주님은 몰라라 하지 못하십니다.
시편 123편 1,2절을 봉독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우리 개 둘리는 제게 맛있는 것을 먹으면 애처롭게 나를 쳐다보고 과자를 쳐다보면서 끙끙거립니다. 그러면 제 마음이 약해서 과자를 조금씩 주곤 합니다. 애처롭게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또 13절도 봉독하시겠습니다.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라.” 여호사밧은 모든 백성으로 금식을 선포하고 모든 사람들로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지켜주셨습니다.
 
II. 둘째, 여호사밧의 기도가 응답된 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기도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9절)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어주실 수밖에 없는 기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부여잡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그의 약속은 신실하고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믿습니까? 아멘.
1)노아가 60년 동안 사람들의 조롱 가운데서도 stop 하지 않고 계속 방주를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2)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미지의 세계인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그의 약속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3)오늘 말씀을 보니까 여호사밧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그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봅니다. 8, 9절을 봉독하시겠습니다. “저희가 이 땅에 거하여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건축하고 이르기를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온역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전 앞과 주의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역대하 6:28-31절의 말씀으로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기도로 역대하 7: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기도대로 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가는 자를 하나님은 몰라라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나아갔기 때문에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변개치 않으시기 때문에 그의 약속을 근거로 해서 아뢰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받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III. 셋째,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호사밧에게 구원해 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5,17절)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15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삼상17:4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전쟁이 여호와께 속한 것임을 믿었기에 다윗은 자신의 칼 솜씨를 믿지 아니하고 주의 능한 팔을 의지하였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손에 있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야 우리가 안전히 살아갑니다. 믿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심을 믿고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에서도 용감히 전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대하 18장에 보면 아합이 전쟁에 나갈 때에 미가야가 그가 전쟁에서 죽고 살아오지 못하리라는 불길한 예언을 합니다. 그래서 아합은 왕복을 벗고 일반 사병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전쟁에 나아갑니다. 그런데 적군이 쏜 화살이 우연히 그의 갑옷 틈 사이에 꽂혀서 그만 죽고 맙니다. 내가 화살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화살이 내게 맞지 않게 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불 가운데를 지나도 타지 아니하겠고 물 가운데를 지나도 침몰치 못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나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보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시면 천천의 군대가 에워싸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선한 목자 여호와가 함께 하시면 사자가 우글거리는 산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나를 보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IV.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해야 합니다. (20절)
20절을 봉독하시겠습니다.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나님을 신뢰하면 견고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곧 넘어지고 맙니다. 주의 종의 말을 신뢰해야 그들의 삶이 형통합니다.
그들이 예복을 입은 성가대를 군대 앞에 앞세우고 여호와를 감사 찬양하며 전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고 적들이 피차에 서로 쳐서 그들은 손 까딱하지 않고 대승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3,14절에도 바로의 군대가 그들을 쫓아 홍해까지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또 하나님께서 우리 대장이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보아야 합니다. 29,30절도 봉독하시겠습니다. “이방 모든 나라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적군을 치셨다 함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한 고로 여호사밧의 나라가 태평하였으니 이는 그 하나님이 사방에서 저희에게 평강을 주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때 그들의 삶에 참 평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키셔야 참된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참 평강이 있습니다. 주께서 그의 평강을 여러분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결론
먼저,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는 여호사밧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여호사밧처럼 우리의 어려움 가운데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에 양다리를 걸쳐서는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주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승리를 가져다 주십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행하시는 구원을 체험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1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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